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바리스트 갈루아 (문단 편집) === 젊은 천재의 죽음 === 일주일 후, 갈루아는 [[공화주의]] 시위를 하던 도중 사소한 이유를 계기로 체포되어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갈루아는 수학을 자신의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고 연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의외로 감옥 내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하며, 한번은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자 죄수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1832년 봄, [[파리(프랑스)|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관계 당국은 젊은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 안에는 갈루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갈루아는 병원 의사의 딸이었던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갈루아가 스테파니가 보낸 편지를 모두 찢어버려서 불태웠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갈루아의 수학 논문 뒤편에서 확인된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스테파니는 그냥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면서 갈루아를 거절했다. 갈루아가 죽기 며칠 전의 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랑했던 여인 스테파니를 둘러싼 [[결투]][*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당시 유행하던 결투의 방식이었다.]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혁명가인 갈루아가 스스로를 혁명의 제물로 삼았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다. 결정적으로 갈루아를 죽인 범인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갈루아가 짧은 인생 동안 열정적으로 하도 많은 결투를 치러서, "그가 이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5월 30일 아침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죽어가는 그를 한 농부가 발견하고 기겁하여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급히 입원한 코친 병원(Hôpital Cochin) 의사들은 배에 총알이 깊숙이 박혀 제거해도 며칠도 못 넘길 것이라며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당시에는 마취가 없어 큰 수술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고 설령 수술을 해도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어 감염으로 죽는 일이 흔했다. 당시의 외과술은 현대와 비교하면 매우 열악했다. 갈루아가 죽고 50년 가까이 지나서 1881년 바로 [[미국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도 [[암살]] 미수를 당해 무사했건만, 수술 과정에서 소독안한 메스로 총알을 제거하다가 감염된 [[패혈증]]으로 죽었다. 하물며 1830년대에는 어떨지 알만하다. 성격이 모나다보니 식구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가 병원에서 죽을 당시, 그나마 그를 유일하게 존경하던 13살 난 막내아우 알프레드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우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보이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알프레드는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이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형의 동판화를 제작했다.] >Ne pleure pas, Alfred ! J'ai besoin de tout mon courage pour mourir à vingt ans >'''울지마라, 알프레드!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갈루아는 다음 날인 5월 31일, 아침 10시쯤에 2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 동지들은 젊은 천재인 갈루아의 죽음을 구실로 삼아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지만,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오른팔인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라마르크 장군]]이 같은 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렇게 갈루아의 죽음은 [[1832년 6월 봉기|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에 의해 그대로 묻혀버렸고, 갈루아의 장례식도 급히 마무리되었다. 한 술 더 떠, 갈루아의 무덤은 대충 공동무덤에 아무렇게나 묻혀져서 대체 어디에 묻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도 세월이 지나서 만들어진 가묘만 있을 뿐이다. 그를 존경한 알프레드가 평생을 진짜 무덤을 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여 아쉬움 속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Tombe_galois.jpg]] 갈루아의 무덤. 가묘이다. 그래도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 때 본격적인 봉기가 발생했는데 이게 바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핵심적인 사건으로도 유명한 [[1832년 6월 봉기]]다. 갈루아의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관계로, 갈루아가 받을 수 있던 최고의 상인 [[그랑프리]]는 [[노르웨이]]의 수학자인 [[닐스 헨리크 아벨]]에게 대신 수여되었다. 그러나 아벨 역시 사후에야 이 상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생전에 갈루아는 아벨의 연구 성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천재라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